[Nathan Park 기자의 시사분석] 데스 플레인스의 블랙 호크
시카고 북서부 서버브인 데스 플레인스는 교통이 좋아 한인들도 다수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다. 예전부터 시카고에서 출발한 기차가 이 곳을 지나 위스콘신 방향으로 향하기 때문에 교통의 요충지였다. 지금은 인구 6만명의 작지 않은 도시다. 이 도시의 이름은 다운타운 동쪽을 가로지르는 데스 플레인스 강에서 따왔다. 데스 플레인스 강은 프랑스식 이름으로 평원을 뜻하는 플레인을 흐르는 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프랑스 탐험대가 이 곳에서 유럽식 나무들을 만나면서 반가운 마음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알려졌다. 이후에는 독일계 이민자들이 다수 정착하게 됐다. 이 곳에는 현재도 매리빌 아카데미라고 하는 교육기관이 있다. 카톨릭 재단이 운영하는 교육기관인데 이 곳에서 100여년 전에 아메리카 원주민 학생들을 교육시키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일종의 실험이었던 원주민에 대한 교육은 실패로 돌아갔고 미국이 어떻게 원주민들을 다뤘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로 현재까지도 종종 언급되고 있다. 1883년 트리뷴지는 40명의 수(sioux)족 인디언 남학생들이 당시 세인트 매리 트레이닝 스쿨로 불렸던 매리빌 아카데미로 이주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들은 다코타 인디언 보호지역에서 살다가 연방 정부의 교육 정책으로 시카고 서버브로 이주하게 됐다. 이들 중에서는 Sitting Bull, Black Hawk, Good Bear 등 유명한 추장의 아들들도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추장들은 다코타 지역에서는 아직까지도 전설로 남아 있는 인물들이다. 대부분 서부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유럽계 이민자들에 맞서 끝까지 투쟁하던 용사들이었다. 학교로 이주한 이들의 나이는 11세부터 23세였다. 이들은 부모들의 동의를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 연방 정부의 이주 정책에 의해 강제로 이주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이렇게 원주민 보호구역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동쪽 지역으로 이주시킨 것은 미국 연방 정부의 그간 정책에 반하는 일이었다. 연방 정부는 1830년 인디언 제거법을 발효시킨 이후 미시시피강 서쪽으로 인디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역사는 동부 지역에 정착한 유럽 이민자들이 서쪽으로 전진하면서 이미 살고 있었던 아메리칸 원주민들을 몰아내는 과정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는 협정을 맺어 인디언들이 자신들의 거주지역을 양보하기도 했지만 이들과의 전쟁은 불가피했다. 때에 따라서는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디언들을 특정 지역으로 옮기기도 했던 것이 연방 정부의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런 정책과 비교하면 세인트 매리 학교로의 학생 이전은 상반되는 정책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정책이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연방 정부의 재정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즉 세인트 매리 트레이닝 스쿨의 경우에도 연방 정부가 이 학교를 운영하는 시카고 카톨릭 교구청에 인디언 학생 한 명당 연 107달러씩을 지원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즉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교가 연방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인디언 학생들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학생들에게는 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서양식 문물이 주입되기 시작했다. 이들 인디언 학생들은 동부로 이주하면서 영어 이름으로 개명했다. 또 전통적인 인디언 복장을 버리고 서양식 바지를 입었다. 학교로 이주한 첫날 머리부터 짧게 자르기도 했다. 이 정책은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40명의 학생들이 학교가 정해준 바에 따라 적응을 했다. 공예반에서 기술을 배우기도 했고 제빵 기술을 익힌 학생들도 있었다. 또 4~5명은 목공 기술을 배웠고 일부는 신발과 의류 제작 기술을 배웠다. 이 기술을 배운 학생들이 다시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들어갔을 때 원주민들이 미국식 문화를 전파하는데 앞장 설 것이라는 희망적인 기대도 나올 수 있었다. 반면 일부 인디언 역사 연구가들은 이러한 정책이 인디언 말살 정책의 성격을 가졌다며 비판했다. 인디언 이주 정책이 그들이 갖고 있는 문화를 없애고 서양식 문화를 강제했다는 이유에서다. 일부에서는 “이들로부터 인디언 문화를 없애고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측의 바람과는 달리 이 정책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이유는 연방 정부의 재정 지원이 중단됐기 때문이다. 연방 정부는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고 차라리 그 재원을 다른 곳에 쓰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1886년 10월 28일 인디언 학생들은 원래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모든 학생들이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세인트 매리에서 생활하다가 다섯 명의 학생들이 호흡기 질병을 앓다가 숨졌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름은 학교 기록에 따르면 인디언식으로 Red Bull, Black Hawk, Gray Bear, Walking Buffalo 등이었다. 이들의 유해는 데스 플레인스 리버와 센트럴길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세인트 메리 공동 묘지에 묻혔다. 아메리칸 원주민들의 역사는 그렇게 시카고의 서버브에도 남게 된 것이다. (편집국) Nathan Park 기자Nathan Park 기자의 시사분석 플레인스 블랙 인디언 남학생들 이주 정책 다코타 인디언